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드르 보로딘 (문단 편집) == 생애 == 보로딘은 1833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조지아]] 출신의 러시아 귀족인 아버지 '루카 시모니스 제 게데바니슈빌리(ლუკა სიმონის ძე გედევანიშვილი)'와 유럽계 어머니 '예브도키야 콘스탄티노브나 안토노바(Евдокия Константиновна Антонова)'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이 때문에 아버지의 농노인 '포르피리 이오노비치 보로딘(Порфирий Ионович Бородин)'의 아들로 입적, 어머니 밑에서 자란다. 그러니 '보로딘'이란 성은 아버지의 성이 아니라 농노의 성이다. ~~[[막장 드라마]] 한 편 써도 될 정도의 가족사~~ 어쨌든 어머니 밑에서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고, 9살 때부터 [[피아노]], [[플루트]], [[첼로]] 등의 악기를 배우며 9세에 [[폴카]]를 작곡, 13세에는 플루트 협주곡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전공을 화학으로 선택하여 [[상트 페테르부르크]] 의과대학에서 화학과 의학을 전공한 후 1859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유학을 가는데, 그 곳에서 요양 중이던 아내를 처음 만나고 후에 결혼에 성공하지만, 아내는 병약한 탓에 보로딘은 계속 아내를 간병해야 했다. 이후 모교의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는데, 알데하이드 연구를 하였다고 한다. 교수로 재직하던 중에 발라키레프를 알게 되어 작곡을 배우고, 교수 일과 아내 간병으로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어 작곡에 힘쓴다. 한편으로 러시아 5인조에 가입해 러시아 국민음악의 창조에 전력을 다하고, 여성해방운동에도 관여해 러시아 최초의 여자의학교 설립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1869년, 그의 나이 36세에 드디어 [[교향곡]] 1번을 초연하여 호평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작곡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하고, 그의 대표작인 교향곡 2번과 [[오페라]] '이고르 공'에 착수하지만 이번에는 화학자로서 그의 논문이 표절 시비에 휘말리는 바람에 작곡을 중단, 작곡이 늦어지게 된다. ~~투잡족의 비애~~ 이후 논문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면서 다시 작곡활동을 시작, 교향곡 제2번을 완성한다. 이 곡은 [[프란츠 리스트]]에게 격찬을 받고 그의 이름을 널리 퍼트리는 계기가 된다. 이후 해외로 여행을 떠났다 다시 귀국하여 현악 사중주 1번, 교향적 스케치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를 작곡한다. 이후 계속해서 오페라 <이고르 공>, 현악 사중주 2번, 교향곡 3번의 작곡에 힘쓰지만, 워낙에 바쁘다 보니 작곡이 늦어졌다.[* 1880년대쯤 되면 화학자, 대학교수 뿐 아니라 여성교육운동에도 깊이 관여했으니, 작곡할 시간이 있을리가...] 결국 오페라 <이고르 공>과 교향곡 3번은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 1887년 어느 무도회 자리에 참석했다가 심장발작으로 ~~과로사~~숨을 거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